[시민의소리=사설] 제78주년 제헌절.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의 헌정 질서를 선포하며 근대 국가로서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헌법은 단순한 법률의 모음이 아니다.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국가에 부여한 권한의 한계이자, 국가가 국민에게 약속한 존엄과 가치의 총체이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 헌법은 모진 풍파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보루였으며, 눈부신 경제 성장과 사회적 다원화를 가능하게 한 기본 토대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헌정의 현실은 그리 밝지 못하다.
정치는 타협을 잃었고, 대화의 광장은 갈등의 골로 깊게 파여 있다.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헌법적 가치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정파적 이기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극성을 부린다.
헌법 제1조 제2항이 규정하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구절은 정치적 수사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권력은 주권자의 삶을 보듬기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층적인 위기는 결국 헌법 정신의 실종에서 기인한다.
인구 절벽과 초고령화라는 인구학적 대재앙, 심화하는 양극화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그리고 세대와 젠더 간의 극한 갈등은 개별 정책의 실패를 넘어선다.
이는 헌법이 지향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우리 사회 곳곳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특히 50-60대 장년층을 포함한 고령 인구의 급증은 노동 시장의 재편과 복지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나, 입법부와 행정부는 헌법적 책무인 '국민의 복지 증진'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헌법은 고정불변의 경전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합의를 담아내는 살아 있는 유기체여야 한다.
오늘날 제헌절을 기념하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헌법 조문을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급변하는 21세기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헌법적 가치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구현할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기후 위기, 디지털 전환, 고령화 사회의 안전망 구축 등 과거 헌법 제정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도전 과제들이 눈앞에 산적해 있다.
이제는 헌법이 선언한 기본권의 범위를 넓히고, 소외되는 이가 없는 사회적 연대를 헌법적 가치로 승화시켜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정치권의 각성과 태도 변화이다.
헌법 수호의 최전선에 서야 할 국회와 정부가 오히려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정쟁에 몰두하는 현실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헌법이 보장하는 권력 분립의 원칙은 견제와 균형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상대를 타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대화의 통로를 전면 차단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권력자의 편의에 따라 가변하는 도구가 아니며, 헌법정신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국정을 운영하는 이들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제헌절 아침,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다시금 자문하게 된다.
국가의 품격은 외형적인 경제 지표나 군사력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헌법적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고, 법 앞의 평등이 상식이 되는 사회가 진정으로 품격 있는 국가이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상생과 연대의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은 결국 최초의 약속인 '헌법'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넘어, 법의 정신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78년 전 제헌 의원들이 가슴에 품었던 '민주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엄숙한 다짐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복원해야 한다.
정치는 부단한 성찰을 통해 헌법의 본령으로 복귀하고, 국민은 주권자로서의 감시와 연대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2026년의 제헌절이 형식적인 기념일을 넘어, 무너진 헌정 질서를 바로 세우고 미래 공동체의 상생을 다짐하는 진정한 전환점이 되기를 강력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