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소리=사설] 2026년 10월 9일, 오늘은 제580돌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80년,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가갸날'을 제정한 지 100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올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 '훈맹정음'이 반포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글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분명했다.
글을 몰라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지배층이 사용하던 한자는 일반 백성에게 높은 장벽이었다. 세종은 그 장벽을 허물었다. 백성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자 체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100년 전인 1926년에도 한글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일제강점기 조선어연구회는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가갸날'을 제정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우리말을 지키는 일은 민족의 정신과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후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우리말을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데 헌신했다.
일제의 탄압과 투옥에도 굴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노력이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하는 한글의 밑거름이 됐다.
정부는 올해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내 곁에 한글'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국립한글박물관도 한글날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특별전을 준비했다.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선조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념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에 담긴 정신을 오늘의 국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문자 가운데 하나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국민이 매일 접하는 행정문서와 정책 안내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넘쳐난다.
복지제도를 신청하려는 어르신이 안내문을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서민들이 금융상품 설명서를 읽고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글자는 한글이지만 국민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언어인 셈이다.
특히 장애인과 고령자, 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쉬운 우리말 사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공공문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와 음성정보, 어르신들이 읽기 편한 생활 안내문은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당연히 보장해야 할 권리다.
100년 전 박두성이 훈맹정음을 만든 정신도 누구나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믿음에 있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한글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번역하며 지식을 전달하는 시대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언어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진다.
정확한 우리말을 사용하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며, 차별과 혐오보다 존중과 배려의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한글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언론은 어렵고 복잡한 세상의 이야기를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면서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기사를 쓰는 것이 한글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다.
580년 전 세종대왕은 백성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100년 전 선조들은 그 문자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이제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한글을 자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배우고,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한글날은 글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존엄과 평등을 되새기는 날이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오늘의 행정과 교육, 언론과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쉴 때 한글은 더욱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빛날 것이다.
한글의 진정한 위대함은 아름다운 글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글자로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 그것이 제580돌 한글날을 맞아 우리가 실천해야 할 시대적 책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