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기간 신규 의심 계정 51% 증가…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국내 정치인 공격
외국 개입 가능성 철저히 조사하되 AI 예측을 ‘확정된 여론조작’으로 단정해서도 안 돼
[시민의소리=사설] 인터넷 댓글이 단순한 개인 의견을 넘어 민주주의의 여론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KAIST와 독일 막스플랑크 보안·정보보호연구소 공동연구팀은 2006년 4월부터 2025년 3월까지 약 20년간 네이버 뉴스에 작성된 댓글 약 1억1265만 건을 분석했다.
연구에는 약 400만 명의 이용자 활동이 포함됐으며, 연구팀은 이 가운데 2만3998개 계정에서 조직적 영향력 활동과 일치하는 행동 특성을 찾아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들 계정의 활동 방식이다.
연구팀 분석에 따르면 외국이나 특정 우호세력을 노골적으로 칭찬하는 것보다 대한민국과 한국 사회, 국내 정치인을 비난하는 방식이 두드러졌다.
이용자 반응이 높은 한국 비난 댓글의 주요 표적에는 진보와 보수 양쪽 정치인이 모두 포함됐다.
한쪽 정치세력을 일방적으로 돕기보다는 한국 사회 내부의 불신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식이 효과적인 영향력 전략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선거 시기다.
대통령선거·국회의원선거·지방선거 전후 30일이 포함된 기간에 처음 등장한 의심 계정은 주당 평균 34.19개로 비선거 기간의 22.61개보다 약 51% 많았다.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인 선거 시기에 의심스러운 온라인 활동이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지켜야 할 팩트의 경계가 있다.
연구팀이 찾아낸 2만3998개 계정이 실제 외국 정부나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논문 역시 이들을 독립적으로 검증된 외국 행위자가 아니라 AI 모델이 외국 영향력 활동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예측한 ‘의심 계정’으로 규정한다.
연구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2024년 공개한 외국 연계 계정 70개를 출발점으로 후보군을 확대하고 행동·댓글 특징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선거기간 의심 계정이 51% 증가했다는 수치도 마찬가지다.
같은 기간 새롭게 등장한 일반 이용자 역시 24% 증가했다.
신규 이용자 가운데 의심 계정 비율은 비선거 기간 0.82%에서 선거기간 0.91%로 높아졌다.
따라서 이 통계 하나만으로 외국 세력의 선거 개입이 입증됐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정치권에서는 '온라인 댓글 국적 표기제' 도입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여당은 여론 조작 방지와 선거 개입 차단을 이유로 법안 추진에 속도를 내는 반면, 일각에서는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 조장이나 표현의 자유 침해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러나 타국의 여론 공작으로부터 자국의 민주주의와 디지털 주권을 지키는 것은 방어적 차원의 정당한 권리다.
국적 표기제는 여론 조작 세력의 익명성 뒤에 숨은 불순한 의도를 견제하고, 이용자들에게 정보의 출처와 맥락을 정확히 판단할 기준을 제공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국외 세력의 조직적인 여론 개입과 사회 분열 공작까지 방치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국회와 정부는 이번 과학적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댓글 국적 표기제를 포함해 포털 사이트의 여론 조작 방지 대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이 건전한 토론을 펼쳐야 할 공론장이 국외 여론 공작 세력의 놀이터로 변질되는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
여야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을 외국 세력의 편으로 몰아붙이는 정치공방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 포털사업자는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해외 접속 여부, 반복 문구, 비정상적인 활동량, 계정 간 연계성, 동일 기사 집중 활동 등 여러 신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투명한 대응체계부터 구축해야 한다.
단순히 외국에서 접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이용자를 여론조작 세력으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해외동포와 유학생, 주재원처럼 해외에서 한국 뉴스에 의견을 남기는 국민도 많기 때문이다.
국적이나 접속 국가 하나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성과 조작성이다.
포털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뉴스 댓글이 사회적 여론 형성의 한 축으로 기능한다면 비정상적인 계정 활동과 조직적인 댓글 확산을 탐지하고, 이용자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과 근거를 공개해야 한다.
이번 연구가 ‘설명 가능한 AI’를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댓글은 작은 문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수만 개의 계정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면 민주사회의 판단을 흔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외국 세력의 온라인 영향력 활동 가능성을 가볍게 보는 것도 위험하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AI 예측을 정치적 확정 사실로 만드는 것 역시 위험하다.
필요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증거이고, 정쟁이 아니라 제도다.
대한민국의 여론 공간을 외부의 조직적인 조작으로부터 지키면서 동시에 국민의 표현의 자유까지 지켜내는 것, 그것이 이번 연구가 우리 정치와 플랫폼에 던진 진짜 숙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