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민족시인 초허 김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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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민족시인 초허 김동명"
  • 구리남양주 시민의소리
  • 승인 2021.02.19 16:57
  • 조회수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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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주기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 ~ 1968)
독재에 까칠한 시인 교육자 정치인 정치논객

민족시인 초허 김동명 시인 53주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생활력 강한 어머니 사랑으로 일제와 북한과 남한의 독재에 까칠한 시인 교육자 정치인 정치논객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 ~ 1968)

2020년 봄 초허 김동명 묘지 터를 찾았다. 경주 김씨 강릉 사천 수은공파 9대 종손인 김회기 선생과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망우산 능선을 오갔다. 김동명 시인의 장례식과 성묘와 이장 등을 주관한 종손은 자신 있게 묘지 터 주변의 큰 소나무와 출입하던 오솔길 등을 기억하였다. 만약 망우리공원에서 이장한 분의 묘역을 다시 복원한다면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문중 납골당에 모신 초허 김동명 시인의 재 이장을 재고하겠다고 약속했다. 묘지번호 204707이었다.

초허 김동명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 폐허파에서 번영로, 오상순, 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 이희승, 젊은 층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 이한직 등 문장출신 및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사용과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등이다. 이들은 친일 문장을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임종국 친일문학론(1966)에서

필자가 파악한 한용운, 김동명, 이상화, 백석, 심연수, 오일도, 오장환 등 시인도 친일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망우리공원에 한용운 시인 유택이 남아 있고, 김동명 김영랑 시인의 유택은 이장했다.

1923년 김동명은 개벽10월호에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는 이 시를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에게 바친다. 이 헌정시는 그가 지닌 퇴폐주의적인 기질을 드러내지만 썩 훌륭한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조선문단,조광, 신동아등에 많은 시들을 내놓아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0년 이후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펴자 그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결기를 보이기도 한다.

초허 김동명은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로 근무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 둔 시인 백석이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초허보다 열두 살 아래였다. 초허 김동명 선생을 도와 교지 영생을 만들었다. 문학평론가 백철도 백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소설가 한설야도 카프 제2차 검거 때 체포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 함흥에 있었다. 서점과 인쇄소를 운영하며 초허와 교류하며 객지살이하는 백석의 정신적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소천 강용률의 함흥 영생고보 선생님으로 초허 김동명, 백철, 백석 등이 있었다. 특히 백석과는 나이 차이가 세 살 적은 늦깎이 학생이었다. 소천은 1931년 영생고보에 입학했다. 그 때 이미 강소천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시 봄이 왔다등을 발표하여 등단한 소년문사였다. 강소천은 1937년 졸업 후에도 백석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사숙을 하였다. 1941년 동시집 호박꽃 초롱서시를 써 주었다. 백석 시집 '사슴' 33편의 시와 호박꽃 초롱 33편의 동시는 3.1혁명 33인 민족대표를 뜻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인  정종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가톨릭문인회 회원 시집 봄동,해찰외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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