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원’의 구리택시 38년 [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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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원’의 구리택시 38년 [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 구리남양주 시민의소리
  • 승인 2019.12.18 13:18
  • 조회수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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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욱 칼럼니스트
송재욱 칼럼니스트

[시민의소리=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구리에서 택시를 운전하면 하루에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의 승객을 만난다고 한다. 

한 달이면 삼 사백여명. 1년이면 대략 4천여명의 시민을 만난다. 

리 남양주에서 38년간 택시 운전을 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시민들을 만났고 얼마나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을까? 어쩌면 구리시의 산 증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58년 개띠인 개인택시 운전사 '장희원'은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열일곱 나이에 무작정 구리로 올라와 사노리 누나 집에 머물며 배 밭농사를 돕거나 타이탄 트럭으로 운수업을 하던 매형의 조수로 일했다. 

춘기를 지독하게 앓았나 보다. 

육상,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던 그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여전히 농사일을 하고 있는 그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노는 게 좋았다고 한다. 

텃세가 심하긴 했지만 3km가 넘는 길을 오가며 교문리 바람을 쐬는 것이 좋았고 경춘선을 타고 청량리로 대성리로 다니는 일이 낙이었다.  

결국 그는 스무 살이던 1978년에 운전 면허증을 따고 바람처럼 다니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교문동 양주 주유소 자리에 있던 남양택시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면허가 있었지만 바로 택시를 배정받지 못한 비정규직이었다. 

소위 스페어 기사로 운전대를 잡은 첫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시 택시 요금이 600원이었는데 주유를 하고 나니 손에 쥔 게 단돈 천 원이라 첫 날부터 사납금을 입금하지 못해 기쁨이 슬픔과 좌절로 바뀌었던 그 날을. 

방위근무를 마치고 들어갔던 회사에서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사내연애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본격적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100만원짜리 전셋집이나마 신혼집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딸기원에 있던 영훈 택시에서 일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경기도 좋아 벌이가 좋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인 당시 열심히 운행하면 한 달에 30만원 정도는 벌 수 있었는데 공무원 월급보다 2배가량 많은 액수였다. 

법인 택시에서 몇 년 만 일하면 개인택시를 몰 수 있다는 희망도 꿈꿀 수 있었다. 

는 하루에 2만 8천원이었던 사납금을 미리 넣고 아이들을 데리고 하루 종일 청평으로 놀러 가는 단란한 생활도 즐길 수도 있었다며 흐뭇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얼마간 시련도 있었다. 뜻하지 않은 접촉사고로 인해 개인택시 면허를 다른 사람보다 늦은 8년 만에 어렵사리 따냈다. 

면허를 기다리는 6개월 동안 공사장에서 잡부 일을 하며 버티기도 했다. 

그는 기다린 보람 끝에 당시 최신형 승용차였던 스텔라 택시를 뽑던 날을 생애 최고의 날 중의 하나로 꼽는다. 

지금까지 28년째 구리시에서 개인택시를 몰고 있는 어엿한 사업자가 된 것이다. 

그간 많은 승객들을 만났다. 택시 운전을 하길 잘 했구나 하는 뿌듯한 일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깃꼬깃 접은 쌈짓돈을 찾아드렸더니 한 달 용돈을 찾아주었다며 고마워하는 동네 어르신. 응급차도 많지 않았을 때 산모의 부름에 한 달음에 달려갔던 일. 개인택시 축구단 창설 감독을 맡아 젊었을 때 꿈을 뒤늦게나마 이어갔던 때.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7이나 1994에서 볼 수 있었던 과거 택시 승객들의 풍경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당시엔 네비게이션이 없었다. 한 번 운행한 길은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남들보다 돈 벌이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좋아야 했다. 

하지만 구리시 택시는 면적이 넓은 다른 도시에 비해 길이 뻔했다. 

호수다방에서 평화 수구레로 이어지는 시장 골목으로 주로 다닌 길이었다. 

좁은 동네라 얼굴을 보면 어디로 가는 지 행선지도 훤히 다 아는 사이였다. 

거리는 경쟁이 심해 구역을 정해 놓고 운행했는데 그는 주로 남양주 진접이나 장현 방향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장현에 누구 집 딸을 태워 달라고 전화가 오면 내 딸처럼 달려갔고, 산모가 애를 낳는다면 119 응급차를 대신해 비상등을 켜고 쌩쌩 달렸다고 한다. 

구리시내에서 술자리를 마친 장거리 손님들은 퇴계원, 금곡, 망우리 방향으로 흩어져 택시 승강장 인근 포장마차에서 다시 소주 한 잔을 더 기울였다고 한다. 

비싼 장거리 택시비를 4분의 1로 줄이기 위해 자연스레 합승 승객을 찾는 짝짓기가 이뤄지는 진풍경이 빚어진 것이다.

그러면 요즘의 택시풍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엔 대성리나 금남리 등으로 관광이나 여행을 가는 승객들을 많이 태웠지만 갈수록 승용차가 늘어나면서 장거리 손님들이 줄어들었고 요즘은 짧은 거리 승객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내 길이라도 많이 다니는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체력도 신경 써야 할 나이라 주머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예전 멀리 다닐 때는 요금 시비로 승객과의 다툼이 많았는데 그땐 택시 미터기보다 주로 기사님과 승객 사이의 협상, 소위 ‘말 미터’에 의존해 벌어진 일이었다. 

돈이 없어 도망가는 학생을 붙잡으러 뛰어가는 웃지 못 할 촌극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차량마다 블랙박스가 있고 신용카드 결제가 대부분이라 승객과 싸울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기사식당에서 점심값을 계산할 현찰이 없을 때가 많다고 앞으로 택시를 타게 되면 현찰을 내달라고 내게 부탁하며 웃는다.  

즘 승객들은 예전만큼 정치 얘기를 많이 안 한다고 한다. 

아예 짧은 거리엔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줄어든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핸드폰 들여다보기 바빠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장희원' 기사님은 구리시에서만 38년째인 베테랑답게 구리시 교통문제에 대해서 몇 가지 조언을 건넨다. 

역시 제일 큰 문제는 구리시민이면 누구나 공감하듯이 좁은 골목길과 주차장이다. 

경마장 사거리에서 일화 공장터로 이어지는 길은 인도도 없고 주차되어 있는 차가 많아서 지나는 차가 마주치면 비켜가느라 막히는 일이 다반사다. 

는 남양시장 뒤편 길이나 교문초 부근 골목길을 일방통행으로 바꾸면 교통이 좀 더 원활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주차난 때문에 동네 주민끼리 다투고 차량 주행이 어려운 곳이 많은데 이런 곳은 동네마다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에 지하 주차장을 만들어 주차난을 해소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학교 운동장 지하에도 주차장을 건립할 수 있다면 인근 주민들이 편리해 질 것이라 한다. 

그는 구리시가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하면서도 한 단계 더 좋아지려면 시민들이 지혜를 모아 주차난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경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 어떻게 하면 택시 기사님들의 돈벌이가 좀 나아질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구리시에 큰 회사나 공장이 들어와야만 한다고 답한다. 

은 시민들이 서울로 출퇴근하는데 왕복 몇 시간이 걸리니 밤에 퇴근해 집에 오면 지치고 소비할 시간 여력이 없게 된다며 시내에 일자리가 많은 큰 회사가 들어서면 소비인구가 그만큼 늘게 되어 택시뿐만 아니라 전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며 자못 진지해 진다. 

택시운전사 장희원의 삶과 경험들은 구리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관통한다. 

매일 일상이 구리시민과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일을 고민하며 소통하는 일이다. 

바람을 따라 다니지만 그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복 바이러스가 그의 택시를 이용하는 모든 구리시민에게도 전파될 수 있도록.  

 

송재욱 칼럼니스트 프로필

자유한국당 부대변인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학 정치학과 석사

저서 

1) 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 구리구인(九里九人)의 행복이야기
2) 자스민과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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