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스런 자원봉사자 ‘세 번째 미녀 남상화’ [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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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스런 자원봉사자 ‘세 번째 미녀 남상화’ [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 송재욱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29 19:38
  • 조회수 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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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미녀'의 긍정 에너지는 여전히 구리 사회를 등대처럼 밝히고 있다
송재욱 칼럼니스트
송재욱 칼럼니스트

[시민의소리=송재욱이 만난 구리사람] ‘남상화’ 그녀는 명함에 ‘세 번째 미녀’를 새겨 다닌다.

환갑이 넘은 나이로 보이지 않는 자타공인 미녀인데다 항상 웃는 얼굴에다 구리시장의 ‘보이는 라디오’ 시민 DJ로도 활약해 세 번째 미녀라는 명함이 낯설어 보이진 않는다. 명함을 소개하는 그녀의 입담에 웃음이 절로 터지는 건 덤이다.

런데 이 분은 억척 자원봉사자다.

구리시 시민경찰봉사회 소속으로 매주 2회 여성안심귀가 지킴이로 활동하는데다 한 달에 한 번 갈매시립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 생신잔치도 시켜드리고 말벗도 손도 되어 준다.

장애인복지관에서 나오는 각종 이불 빨래도 도맡아 한다.

둘째 주 수요일엔 인창동 무료급식소에서 급식 배식봉사를 한다. 여성예비군 소대장도 맡아 자식 같은 군인들에게 식사대접 봉사도 한다.

지체장애 학생들이 있는 곳에서 청소와 아이들을 안아 주는 것도 그녀의 일이다. 

한 달 스케줄표는 봉사일정으로 빼곡하다. 구리시에서 이뤄지는 봉사활동에서 세 번째 미녀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봉사 현장에서 만나는 남상화는 항상 먼저 안아주고 먼저 손을 내민다. 악취가 심해 남들이 꺼리는 험한 일도 그녀가 앞장선다.

것도 웃는 얼굴로! 내공이 이만저만 쌓인 게 아닐 터.

근데 이 분이 왜 그토록 억척스럽게 자원봉사 활동에 나서게 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봉사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다들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데. 

이야기는 1998년 IMF 때부터 시작되었다. 남편분의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렸고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공장과 집을 날리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지만 아이들의 한 끼 한 끼를 구하기 위해 엄마 남상화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자라기보다는 엄마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력도 한계가 있었고 하루하루 몸도 지쳐갔다. 

그 무렵 구리역 앞을 지나던 남상화님은 구리 청소년 수련관 봉사센터장의 ‘자원봉사 하세요’라는 권유에 소위 길거리 캐스팅을 당하게 된다.

무심코 이끌린 손길에 그녀의 20년 자원봉사 경력이 시작되었다.

전단지 아르바이트, 녹즙 배달, 상품 포장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IMF 이후 네 번의 이사를 다니며 아파트 평수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결국 월세 방으로 내려앉았다.

세 명의 자녀들이 고추장 하나만을 반찬으로 버틸 때도 있었다. 아들이 맹장수술을 했을 때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난은 멈출 줄 몰랐지만 그녀의 봉사활동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줄어드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탱하고 웃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억척스런 봉사활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봉사활동을 나가보면 그녀보다 훨씬 더 어려운 분들, 힘든 분들이 더 많았고 그 분들을 위로하고 같이 다독이면서 오히려 그녀가 살아갈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봉사를 가면 꽉 막혔던 가슴 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봉사를 찾아서 하게 되었다. 자원봉사가 남상화에겐 천직이 되었다. 

요양원 봉사를 가게 되면 봉사자들이 돌아가며 할머니 손을 꼬옥 잡아 드린다.

사람이 그리운 할머니들께서 자식 같은 봉사자들의 손을 놓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남상화님은 감히 그 분들의 눈을 마주 볼 수 없다고 한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동시에 서로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그 분들의 깊은 삶의 질곡을 마주하게 되면서 잠시잠깐 왔다가는 미안함에 가슴이 아프다 한다. 

홀로 계신 어르신께 한 끼 드시게 순두부나 과일 두유를 배달해 챙겨드리고 오면 “빗길에 눈길에 더운데 추운데 와 줘서 고맙다.” 하시며 사탕 한 주먹 쥐어주시던 아버님 어머님들께서 고마움을 전해 주실 때 눈물이 핑 돈다고 한다. 

휠체어와 함께 하시는 어르신들은 “좋아요! 좋아요!”를 연발하시면서 “이뻐! 이뻐!”말씀해 주셨다. 화장실에 가실 때 “혼자 할 수 있어요.”하시면서 잠시나마 부끄러워하시던 어르신들도 생각난단다.  

급식 봉사도 마찬가지. 한 끼 식사 대접으로 그 분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덜어지겠나만 정이 담긴 따뜻한 밥 한 끼, 오랜만에 잡아보는 손길 하나가 만드는 긍정의 에너지는 누군가에겐 삶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때론 누군가에겐 살아갈 이유로 남기에 멈출 수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상화님은 고추장만 보면 지금도 가끔씩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고추장 반찬 하나로 키웠던 세 아이들이 모두 잘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단다. 이제 생활의 여유도 좀 생겼다고 한다.

어느 날 길을 걷던 그녀는 이제 내 몸도 좀 돌봐야지 하며 무심코 한의원의 문을 두드렸다.

진맥도 짚기도 전에 한의사가 던진 말. “그만 깡으로 사세요.”그 말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IMF 이후 13년간 고생고생하며 넘어온 보릿고개 언덕을 이제야 내려오는 자신의 모습이 돌아보였던 것 같다. 

아참! 그녀의 노래방 18번은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다.

“남들은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부르겠지!”라고 오해하는데 아니다. 다름 아닌 보릿고개를 넘던 자신을 생각하며 부른단다.   

남상화님은 오늘도 내일도 자원봉사를 나선다. 자신보다 더 어렵고 더 힘든 분들이 여전히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고 한다.

' 번째 미녀'의 긍정 에너지는 여전히 구리 사회를 등대처럼 밝히고 있다.  

 

구리사람 송재욱 프로필

자유한국당 부대변인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학 정치학과 석사

송재욱 저 '자스민과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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